더경남뉴스가 계절별 꽃 순례를 합니다. 전체 꽃 정취보다 꽃 자체에 포커스를 맞춥니다. 주위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꽃, 야생화로 불리는 들꽃 등을 두루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연일 가마솥 열기를 내뿜는 날씨 속에서도 절기에 맞춘 꽃들은 저마다 열심히 피고 있습니다. 무궁화가, 수국이 그렇고 배롱나무도 그러합니다. 호기로운 극한폭염에도 지금 이때는 자기들의 세상임을 빳빳하게 알립니다. 자태를 뽐내기 위해 장장 한 해를 기다렸다며 폭염이 가소롭단 듯 꽃잎을 활짝 피우고 있습니다.

이번 여름꽃은 부처꽃과에 속하는 배롱나무입니다.

배롱나무는 백일홍(百日紅)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저 꽃 무슨 꽃이야?"라고 하면 열에 일곱 정도는 백일홍이라고 하지요. 꽃은 7∼9월 붉은색 또는 자주색, 흰색 등으로 핍니다. 꽃이 오랫동안, 100일 정도 피어 있다고 해서 이렇게 불립니다.

여러 날 걸쳐 번갈아 피고 져 오랫동안 피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지요.

참고로 화단 등에 더러 심어져 있는 1년생 화초 백일홍과 다른 꽃입니다.

지난 7월 31일 경남 진주시 진성면 천곡리 배롱나무 군락지에서 찍었습니다.

진주시 진성면 천곡리 배롱나무 군락지 모습. 뙤약볕 폭염 속에 굳건하게 지키는 자태가 도도해 보인다.

배롱나무 원산지는 중국인데 우리나라, 일본, 오스트레일리아 등지에 약 30여 종이 분포하고 있다고 하네요.

배롱나무꽃은 분홍색이 가장 많고 흰색과 눍은 보라색이 있습니다.

속설엔 배롱나무를 심은 사람이 숨지면 붉은꽃 대신 소복을 입은 것처럼 흰꽃이 무려 3년을 핀다는 말이 있습니다.

꽃차례 길이늩 10~20cm, 지름은 3~4cm입니다.

꽃잎은 꽃받침과 더불어 6개로 갈라지고 주름이 많습니다. 수술은 30~40개로 가장자리 6개가 길고 암술은 한 개입니다.

멀리서 보면 한 무더기(송이)로 보이지만 가까이서 살펴보면 많은 꽃이 모여 있습니다. 꽃잎 끝자락의 선도 상당히 곱습니다.

분홍색 배롱나무의 꽃말은 '부귀', '떠나간 벗을 그리워함'이고, 흰배롱나무의 꽃말은 '수다스러움', '웅변', '꿈', '행복'이라고 합니다.

배롱나무는 백일홍(百日紅)나무 또는 목백일홍이라고 했는데 '백일홍' 소리가 축약돼 불리면서 '배롱'이 됐다는 설도 있습니다.

줄기는 다 자라면 5m 정도가 되고 곧게 자라지 않고 굽어지게 자랍니다.

열매는 삭과로 10월에 익습니다. 보통 6실이지만 7~8실도 있습니다.

열매 즉, 씨는 기름을 짜고 재목은 줄기와 가지가 깔끔해 도구재, 세공물로 활용됩니다.

번식은 씨를 봄에 파종하는 실생이나 휘묻이 또는 포기 나누기, 물꽂이와 삽목으로 합니다.

파종 묘목은 발육이 빨라 2~3년에 1m 이상 자랍니다.

삽목은 전년에 자란 굵은 가지를 15~20cm로 잘라 흙에 꽂아두었다가 뿌리를 내리면 키우다 다음해 봄에 이식하면 됩니다.

폭염을 쏟아내는 하늘 못지 않게 분홍색 꽃 자태도 흐드러져 있다. 매서운 폭염에 구름의 기세도 만만찮아 보인다.

풍성한 꽃을 단 배롱나무. 한여름 꽃 자태를 오롯이 보여준다.

분홍색 꽃과 푸른 잎사귀, 폭염의 하늘이 한여름임을 나타낸다.

붉은 복슬 눈을 단 듯한 배롱나무꽃 모습

가지 끝에 원추꽃차례로 달린 배롱나무꽃 자태. 봄철에 피는 진달래의 변형 교접종 꽃 같기도 하고 분홍색 털로 짠 꽃으로 보인다.

이상 정창현 기자

□ 배롱나무 다른 이름들과 그 연유

배롱나무는 목백일홍(나무백일홍), 양반나무, 간질나무, 간지럼나무 등으로 불립니다.

배롱나무를 양반나무라고 하는 것은 나무의 생김새와 관련이 있습니다.

배롱나무 연갈색 껍질은 얇게 벗겨져 떨어지면 그 자리에 흰색 또는 회갈색 무늬가 생깁니다. 매끄럽고 윤기가 흘러 '원숭이도 미끄러져 떨어질 수 있는 나무'라고 합니다.

껍질 색깔이 고상하고 단정한 양반의 옷감을 연상시키고, 꽃이 오래 피는 모습이 선비의 지조와 기품을 닮았다고 여깁니다.

배롱나무는 꽃이 피고 지고 하는 기간이 길어 백일 동안 꽃이 피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또 배롱나무는 햇볕이 잘 드는 곳에 심고 양반들이 주로 거처하는 별당이나 정원에 심는 경우가 많습니다. 양반들은 이 배롱나무의 아름다운 꽃과 잎, 껍질의 독특한 질감을 감상하며 자연과 교감했습니다.

사찰이나 고궁에도 꼭 있는 나무입니다.

사찰에 심은 이유는 배롱나무가 껍질을 벗고 깔끔한 속살을 드러내는 것처럼 속세의 묵은 떼를 씻고 묵언수행에 정진하라는 뜻이고, 서원에 심은 것은 청렴을 의미하는 배롱나무처럼 관직에 나설 때 청렴하란 의미에서 심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양반나무라 기개와 충직, 부귀를 상징해 사대부의 정원에 심어 가꾸고 사랑한 나무였습니다.

또 배롱나무는 꽃이 피고 질 때 간지럼을 타는 듯한 모습을 보여 간질나무, 간지럼나무 또는 간즈름나무로 불리기도 합니다.

본래 배롱나무 줄기나 잎, 꽃은 간지름을 타는 것처럼 미세한 진동에도 잘 움직입니다.

나무의 줄기를 손톱으로 긁으면 간지럼을 타는 듯 나무 전체가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해서 붙여졌다고 합니다.

제주도에서는 ‘저금 타는 낭’이라고 부르는데 이 역시 간지럼을 타는 나무라는 뜻입니다.

어린 시절 동네 어귀에 자리한 비석(공덕비 등) 주변엔 배롱나무가 꼭 심어져 있었지요. 멋모르고 나무 줄기와 껍질을 간질러보는 놀이도 했었는데 이런 이유가 있었네요.

일본에서는 게으름뱅이나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추위에 약해 봄에 싹도 늦게 나오는 데서 유래됐습니다.

□ 유명한 곳

배롱나무는 별칭의 유래에서 보듯 기풍이 좋아 사찰, 향교, 서원 등에서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이들 시설에 있는 배롱나무는 경남 밀양 표충사, 경북 안동 병산서원, 대구 하목정, 충남 논산 명재고택, 전남 담양 명옥헌 등입니다.

충청도 이북엔 보기 힘든데 서울 덕수궁 배롱나무도 볼만합니다.

부산 부산진구 양정동 배롱나무는 지난 1965년 4월 천연기념물 제168호로 지정됐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배롱나무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배롱나무는 양정 전철역에서 1.5㎞ 떨어진 화지공원에서 두 그루가 자리하는데 가장 큰 나무는 8.3m입니다.

수령은 800년 정도로 추정(지정일 기준)되고, 800년 전 고려 중기 안일호장(安逸戶長)을 지낸 동래 정씨 시조의 묘소 양 옆에 한 그루씩 심었는데 원줄기는 죽고 주변의 가지들이 별개의 나무처럼 살아남아 오늘에 이른다고 전해집니다.

경남 창녕 사리 배롱나무군은 경남도기념물로 지난 1995년 5월 지정됐습니다.

창녕군 계성면 사리마을 배롱나무군은 임진왜란(1592년) 때 영산(창녕군 남부 지역의 옛 행정 구역)과 창녕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신초 장군이 계성면 사리에 정자를 짓고 노후를 보내면서 정자 주변에 심은(1600년경) 나무들로 현재 35그루가 남아 있습니다.

□ 배롱나무 풍속

제주도에서는 '저곰타는 낭(간지름을 타는 나무)'이라고 부르는데 앞에서 소개했듯 사대부가 정원에 심어 가꾸는 것과 달리 무덤에 심는 나무로 여기고 집안에는 절대로 심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는 흔히 갈색에 우둘투둘한 껍질과 달리 매끄럽고 회색인 나무 껍질이 벗겨지면 살이나 피부가 없는 뼈처럼 보이고, 빨간 꽃은 핏물로 죽음을 연상해 불길하다며 집안에는 심지 않게 됐다고 합니다.

또 남부 지역에서는 귀신을 쫓는다고 해 무덤 주변에 흔히 심는 풍속도 있습니다.

같은 나무인데 정반대 속설이 생긴 것은 사대부들이 백성이 이 나무를 심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해서 만든 속설이 아닌가 합니다. 같은 여름꽃인 능소화에도 비슷한 속설이 있습니다.

요즘엔 정원수로 많이 심습니다.

□ 배롱나무 전설

옛날 바닷가 마을에 사룡과 처녀가 사랑을 피워가고 있었습니다.

마을에선 물속 괴물(용이 못 된 뱀인 이무기)에게 처녀를 제물로 바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이 처녀가 괴물에게 제물로 바쳐졌는데, 이때 사룡이 사랑하는 님 대신 자신이 괴물을 퇴치하겠다고 나섰다고 합니다.

사룡은 처녀와 헤어지면서 자신이 성공하면 흰 깃발을 달고 돌아올 것이고, 실패하면 붉은 깃발을 달고 돌아올 것이라는 언질을 줬습니다.

사룡이 괴물을 퇴치하러 떠난 지 100일이 되는 날, 사룡을 태운 배가 돌아왔는데 붉은 깃발을 달고 있었습니다. 처녀는 사룡이 죽은 줄 알고 무사귀환을 기도하던 절벽에서 몸을 던졌습니다.

사룡이 괴물과 싸울 때 괴물의 피가 달아놓은 흰 깃발을 붉게 물들인 바람에 사룡이 죽은 줄 오해한 것이지요.

사룡은 사랑한 님의 시신을 양지바른 곳에 묻었는데 이듬해 봄 이 무덤에서 처녀를 닮은 나무가 자라더니 여름에 붉은 꽃이 피어났습니다. 배롱나무였습니다.

100일 동안 사룡의 무사생환을 기도하던 처녀의 안타까운 넋이 꽃으로 피었다는 전설입니다.

100일 동안 붉게 핀다고 해서 백일홍으로 이름 붙인 이유와 유사합니다.